지난 일요일, 인공지능과 바이오헬스케어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한국의 의약품 등재 제도에 대해 온라인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나고 적잖은 질문이 쏟아졌는데, 내 기억에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약가 인하 정책으로 인해 제약회사의 신약 개발이 어렵다고 하는데,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채팅창의 질문을 보자마자 ‘옳다’라는 단어에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는 질문자가 궁금했던 부분에서 약가 인하와 신약 개발 간 상관관계를 논하기에는 많은 메커니즘이 있을 것이고, 이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을 단시간에 답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대신 질문의 잠재된 감정에 공감하며 규정에 대한 업계의 시각을 제한에서 활용의 기회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옳음”이란 단어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10여 년 전, 면접을 보기 위해 국민건강보험공단 대회의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였다. 태극기 옆에 ‘국민 건강 증진’이라는 공단의 위대한 비전을 보고 가슴이 뛰었던 적이 있었다. 공단의 일원이 된 것을 자랑스러웠고, 국민건강과 건강보험 재정을 책임질 동료 선후배들이 함께 하는 것이 즐거웠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출근하다시피했다. 경비아저씨들은 사원증을 확인하는 대신 거수경례와 미소로 반겨주셨고, 구내식당 여사님은 계란후라이를 더블로 얹어주셨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부장님이 이미 와 계셨고 곧이어 실장님이 출근하셨다. 그렇게 나의 하루는 오전 8시 전에 시작되었고 밤 9시가 되어서야 아쉬운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서곤 했다. 일요일에 지방을 다녀오더라도 사무실에 들렀어야 했고, 떠오른 아이디어를 프로그래밍하기 위해 해가 뜨기도 전에 사무실로 달려가기도 했다. 자부심과 사명감이 나를 움직이는 강력한 원동력이었고, 당시 나의 사고는 ‘옳음’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사고는 어떠하냐면, ‘합리적인 최선’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옳은 것은 분명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규제기관도 제약업계도 국민건강의 증진, 결국 환자의 질병치료라는 같은 목적 아래에 있다. 단지 서 있는 곳이 다를 뿐이다. 여기서 옳음을 논한다면 누군가는 틀리고 누군다는 맞는 것이며, 이어서 대결구도가 형성된다. 단편적인 부분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은 조금 근시안적이며 긴장감을 높일 뿐이다.
애초에 규정은 어떤 목적을 위해 신설되었다. 굳이 genetic fallacy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규정은 많은 관계자의 입과 귀를 거치면서 수십년 동안 논의와 합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흡사 줄다리기와 같았을 것이다. 당시 정책 방향이나 근거에 의해 좀더 가거니 오거니 하면서 어느 접점에서 합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세상에 없는 게 하나 있다고 한다: ‘정답’ 나는 이런 맥락에서 규정은 길과 같다고 본다. 목적지까지 어떻게 가고 싶은가? 좋은 내비게이션을 들고 촘촘히 길을 따라 갈 수 있겠다. 혹은 길을 고칠 수도 있겠다. 아니면 고속도로처럼 새 길을 만들 수도 있겠다. SRT/KTX를 탈까. 아예 하늘길을 만들면 어떨까. 방법은 찾기 나름이다.
역사를 알면 오늘의 이면을 볼 수 있고 내일을 점칠 수 있다. 나와 같은 선상에 있지 않다고 해서 대립구도로 보기보다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내 선상 너머를 관찰해보면 어떨까. 그러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다. 문제의 본질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틀렸다고 정의한 사람에게서는 어떤 해답도 찾을 수 없다.
강연이 끝난 후 사회자는 질문이 공격적으로 인식될까 봐 걱정됐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일을 하다 보면 열정이 있는 만큼 장벽에 직면하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생각은 정답이 아닐 것이며, 이미 규제기관의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원하는 답을 줄 위치에 있지도 않다. 단지 자신의 일에 열정적일 것이라 짐작되는 그 청중이 최선의 길을 찾게 되기를 응원한다.